'신과 나눈 이야기'는 첫번 째 책이 나올 당시부터 '3부작'이 될 것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첫번 째 책이 '신과 나'라는 일인칭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었다면, 두번 째 책은 '신과 나와 우리'라는 범위로 넓어졌고,
세번 째 책에 이르러서는 '신과 나와 우리, 그리고 또 다른 나'까지로 그 범위가 무한하게 넓어졌습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신, 신적 존재'와의 대화에 대해 벗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포스트에서 '신'이라는 표현은 '저자의 표현'을 그래도 따랐음을 의미합니다. 글 말미에서 이 '신'에 대해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저자의 경험과 사실이 이 책의 근반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책의 내용을 인정할지, 인정하지 않을지에 대한 판단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며, 독자의 선택이기에 벗님은 '신, 신적 존재와의 대화가 아니었다'라고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전재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두께의 이 세 권의 서적을 탐독했던 이유는 '순수하게 책에 담긴 내용들'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수 많은 질문들을 '신'에게 건내고, '신'은 이 이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혹은 한 동안 생각해보아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이야기로 답을 해줍니다.
저자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몇 번이나 다시 물으며 이해가 갈 때까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또 어디로 향하는지 예측할 수 없을만큼
다양하고 중구난방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신'은 한결같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모두 답해주겠노라며 '질문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저 다양한 주제의 질문들에 대해, 현명하고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저런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감탄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신'의 답변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언제나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관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신'은 아무 것도 하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신'은 언제나 그저 팔짱을 끼고 '관찰만' 하고 있을 뿐, 무엇도 하질 않습니다.
종교 단체에서 이야기하는 '엄격한 신, 벌주는 신'과 같은 모습은 이 서적의 어디어서도, 어떤 답변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질 않는다'라고 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은 만큼, 인간 생활에 대해 무엇도 '간섭'하질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되고'와 같은 계율이나 율법 같은 것을 '신'은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단지 이런 '무서운 신'과 같은 모습들은 종교 단체에서 사익을 위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신'은 이야기합니다.
종교 단체의 폐해라고 볼 수 있는 '부와 권력'에서 자유로운(사실상 전혀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서의 '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고,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하던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부분에서는
여러가지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불편하다'라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왜 불편한 것인지'를 사실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적, 사회적, 이성적이라는 테두리로 인해 '자연스러움'이 점차적으로 '배제되어버린 현실과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이 서적을 통해 '사실 그대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제한'들에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신'은 자신은 그저 '관찰'만을 한다고 말합니다. 보통 '관찰'이라는 행위를 떠올려보면, '관찰'이 '관찰'로만 끝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관찰 이후'에 무언가를 판단하며, 좋고 싫음, 옳음과 그릇됨을 구분하고, 또 뒷따르는 행위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좋음과 싫음도 없으며, 옳음과 그릇됨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판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어떤 환경에서 일어난 일인가에 따라서' 그 판단이 다르게 변해버리는 것은 아무런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현 시대의 관습과 가치관, 전통과 정의, 진리 같은 것들이 불과 수 백 년, 수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완전히 다르게 판단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기준'들이 정작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먼 것이라면,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은 충분히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이 포스트 하나에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거론되는 모든 이야기를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분량도 상당하고, 이야기의 주제도 다양합니다.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삶과 죽음, 생명, 외계생명체, 사랑과 두려움, 종교와 사회 등 그 하나 하나가 책 한 권씩은 될 것입니다.
벗님이 생각하고 있는 '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벗님은 '신이 인간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형상과 비슷한 '신'이라거나, 인간 위에 존재하는 어떤 '신'이라는 형태의 '믿음'으로 간주해야하는 존재로서의 '신'은 믿질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창조(혹은 탄생)과 관련되어, 다양성이 혼재된 상태의 생명체의 창조, 자율의지를 갖은 존재들의 생노병사와 관련되어
이 '자연 조화, 혹은 우주 조화'와 같은 '현상들'에 대해 '신과 같은 느낌'을 전달 받습니다. 이는 '믿음'과는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생명체의 근원, 신의 근원, 자연과 우주의 근원은 동일한 것'이며,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와 달이 말을 걸어오고, 별이 속삭여주고, 나무와 풀이, 시냇물이 실제로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 것처럼,
'신'이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는 것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만약, 위와 같은 경험을 이 책의 저자처럼 실제로 느꼈다고 한다면,
이는 '신과의 대화'가 아닌 '자신과의 대화'라고 보는 것이 보다 더욱 합당하게 생각됩니다. '자신의 내면과의 나눈 대화'라고 말입니다.
치열하게, 지독하게, 혹은 처절하게 어떤 대상과의 대화를 원하면, 그 대상이 '신'이라 하더라도 분명 응답을 받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신, 신적 존재, 창조주'와 같은 존재와의 교감은 아닐 것입니다. '내면과의 대화'가 열린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를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열반, 꺠달음, 각성'과 같은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실로 놀라운 경험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무의식과 잠재의식 속에 감추어진, 혹은 표면화되지 않는 이런 깊은 내면의 의식과 교감하는 통로가 갖게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저자가 적어놓은 '신의 대답들'은 랍비, 깨달음을 얻은 고승, 선지자와 같은 높고 깊은 의식을 갖춘 사람들이 말하는 '진리'와 비슷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범접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이 쉽지만, 쉽지 않은 이유는 이런 점 때문입니다.
'신과의 대화'를 부정하는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세상만물'을 모두 창조했고 모두 알고 있다는 '존재'가 꺼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이야기의 깊이와 폭은 깊고 넓기는 하지만, 그 한계가 분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한계란 것은 바로 '저자'입니다.
저자가 알고 있는 사실과 경험, 저자가 깨우친 범주와 저자가 생각했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정의된 범주에 국한된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인식의 범주를 뛰어넘는 이야기들을 이 '신과의 대화'에서는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신과의 대화'가 아니라고 해서, 이 책이 전혀 '쓸모 없다'라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것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 앞에 누구도 앞세우지 말고, 언제나 '자신'이 중심이며 길이다.
-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당연한 것이다. 이것 외에는 의지할 필요는 없다.
- '생각'하면 이루어진다. '마음'먹으면 현실이 된다.
- '느낌'이 곧 '현상의 본질'이며, '행동의 기준'은 그 '느낌'을 바탕으로 하자.
- '내 자신'이 나를 해하지 않 둣, 내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자.
- '사랑'하자. 내 자신을, 우리들을, 내 주위의 사랑스러운 모든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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